"깊게 파기 위해서는 먼저 넓게 파야 한다”고 했던 것은 스피노자였던가.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란 영화연구서 속 7명 필자의 글 11편은 ‘섹슈얼리티’란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 관심의 진폭이 무척 크다. 영화 속 ‘팜므 파탈’(악녀)에 대해 분석하는 글은 그리스 신화 속 여성 판도라에서 시작해서 최근의 한국영화 ‘싱글즈’까지 통시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들을 다룬다. 마초적인 남성미를 강조했던 이전의 남성 스타에 비해 나약하고 수동적인 성적 특징을 지닌 새로운 남성상을 보여주고 있는 요즘 남자 배우들을 묘사하며 남성 정체성의 변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또다른 글은 이를 위해 시선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로라 멀비와 스티브 닐 같은 영화학자의 견해로부터 미셸 푸코와 발터 벤야민의 이론까지 끌어들인다.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와 80년대 ‘에로 사극’ 등을 모두 묶어 ‘여성 몸의 장르’로 명명하는 글에서는 이런 영화들의 왜곡된 여성 묘사를 비판하기 위해 내러티브에서 포스터와 광고 카피까지 폭넓게 분석한다. 일본과 한국의 성인 애니메이션을 파고든 글이 있는가 하면, 에로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들이 심의의 칼날을 피해 어떻게 남성 관객의 시선을 ‘호객’하는지를 일일이 장면 분석하는 글도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각 시대의 대표적 대중 영화들의 이면을 꼼꼼히 읽어냄으로써 그 작품들을 만들어낸 당대의 의식과 무의식을 진단하는 부분들이다. 장난스런 주인공과 모범생인 친구의 갈등과 화해를 장르적으로 반복했던 70년대 ‘얄개’ 시리즈 내러티브의 특징은 청소년 관객의 일탈 욕망 충족과 강압적인 국가 이데올로기의 수용 모두를 불균질하게 담아낼 수 밖에 없었던 시대의 징표로 풀이된다.
90년대 후반 이후 갑자기 남성 화자의 향수어린 시선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들이 붐을 이뤘던 것은 IMF 이후 한국 남성들의 위기감이 깊게 투영된 결과라는 설명도 있다. 그리고 ‘정사’와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일부 연출 의도의 과잉이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새로운 섹슈얼리티 묘사를 관철한 386세대 감독의 전복적 재현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대중영화라는 텍스트를 통해 한국사회라는 컨텍스트를 읽어내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것이 권력과 통념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종종 굴절된 상(像)을 드러내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영화는 예술적 가능성을 수반하는 산업이자, 산업적 가능성이 잠재하는 예술이다. 영화는 예술가의 고고한 성채에만 머물지도, 상인의 저잣거리에 온몸을 내맡기지도 않는다. 태어난 지 갓 100년이 넘어선 새로운 매체가 현대 사회에서 대중의 욕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욕망이자, 동시대의 공기를 휘감는 힘이다. ‘한국영화’는 결코 ‘한국’이라는 시대적, 지리적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영화 속에서 욕망의 지도를 읽어냄으로써 한국사회의 근대성, 남성성, 여성성 등의 키워드를 해독하는 것이 저자들의 목표다.
필자들은 1970년대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얄개영화’ 시리즈가 청소년들의 일탈 욕구를 해소하는 탈출구의 역할과 청소년들을 체제 내부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분석한다. 또 기존의 장르 구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에 걸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을 ‘여성 몸의 장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